정재일이 2집 <Jung Jae Il>을 내어놓고, 군입대를 했다. 7월 5일 월요일. 이 무더운 날씨에.
'공들여 접은 편지 위에 작은 돌 하나 올려 놓고서 다시 길을 가겠다'는 그의 2집 타이틀 곡 '주섬주섬'의 노래 가사처럼. 떠나는 길 위에 편지를 두고 가는 것 처럼, 떠나며 그의 이야기를 적은 음반을 내어주고 입대했다.
'주섬주섬'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느낌은 "어? 이건 99년 그 때, 그 재일이 모습이네?" 였다.
긱스의 천재소년.
내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한상원, 정원영, 이적-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펑크 밴드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나보다도 어린 열여덟살 소년이 있었다. 정재일. 긱스의 베이시스트. 근데 이 나보다 어린 소년이, 베이스만 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곡들을 작곡하고, 거의 모든 악기에 능한 것이다. 대체. 이녀석은 뭔가- 싶었다.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어느 라디오프로.
말한마디 하는것도 수줍은, 이 소년은. "인사좀 해주세요" 라는 DJ의 요청에 "안녕하세요" 라고 한 마디의 짧은 인사를 했고, "좀 길게 해주세요"라며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는 DJ의 요청에 "안녕하세요오-"라고 한마디 또 짧은 인사로 마무리 지었던 그 인사.
그리고, 그 해 겨울, 수능이 끝나자마자 달려갔던 긱스의 그 콘서트장에서. 재일이는 수줍어했지만, 열정적인 연주를 보여줬다. '주섬주섬'은. 그 때 그 감수성 예민하고, 부끄럼많던, 그 때 그 재일이를 보고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줄 수있는 다듬어진 감정들과, 더 세련되어진 표현을 제외하면. :)
2005년 적군의 방 공연때 기타치던 재일.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부끄러워하던 그 소년은 훌쩍 자라, 지나가는 시간만큼 차곡차곡 무엇인가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멋있었다. 그는 그 이후로 <눈물꽃> 이란 이름의, 웅장하고, 일렉트릭한. 어느 영화음악같은 첫번째 앨범도 냈고.
여러 가수 앨범의 편곡자 이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이적의 공연장에서도 볼 수 있었다. 어디의 음악감독으로서 이름도 볼 수 있었고. 김책과 함께 한 <The Methodologies> 같은 내가 이해하기엔 다소 난해한, 앨범도 내면서. '천재소년'은 진짜 '천재'가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이정도 내공을 쌓아내기 위해, 이 사람은 음악에 또 얼마나 '몰입' 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게 또 그렇게 부럽고, 멋있었다.
그런 그가 군입대를 앞두고. 2집을 내어놓았다. 난해하지 않은 담담하고 조용한 말투로. 그는 노래한다.
정재일만의 색깔, 정재일만의 음악, 정재일만의 목소리로.
"이야기의 한 chaper를 끝내고, 앞으로 시작될 새로운 chapter에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들로 꽉꽉 채우고싶다"며.
'윤상', '김동률'과 같은 뮤지션도, '재일이가 제대할 때 까진 편곡해줄 사람이 없어 앨범 내기가 어렵다'는 농담을 할 만큼, 군입대 하루 전까지 '이적'의 새 앨범 스트링 편곡을 해주고 갔을 만큼. 이토록 그를 기다리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마치고 돌아와준다면 좋겠다. :) 이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앞으로의 역량을 너무나도 기대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 앨범은 아주 자그마한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2집 앨범이라는 거창한 생각도 없었구요, ‘앨범을 내서 나를 알려야겠다’라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매우 단순히 이 음악들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1월 EBS space 공감에 초대 받아 세트 리스트를 짜면서 지금까지 만들었던 음악들을 뒤적이게 되었습니다. 발표되지 않았거나, 기록되지 않았던 그 곡들을 듣거나 보면서 ‘기록해 보면 어떨까?’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사가 박창학씨와 대화하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 드렸더니 만들어 보라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매우 절실한 마음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 일들에 치이면서 잊혀졌습니다. 어느 겨울 밤, 박창학씨께서 ‘내가 써 본 거야’라며 이메일로 보내 주신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취상태였었는데 글을 본 순간 선율이 마치 자석처럼 나도 모르게 붙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즉흥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고 할까... 그 곡이 ‘주섬주섬’이라는 곡이 되었고, 이 곡을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기록하고 싶어 졌습니다. ‘자 만들어야 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후다닥 작업에 돌입. 뚝딱뚝딱, 주섬주섬 끝냈습니다. 그리하여 정재일 2집이라기 보다는 가벼운 소품집, 일기랄까, 그런 느낌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곡 수도 총 6곡으로 매우 짧고, 군입대로 인해 공연이나 프로모션도 전혀 불가능하게 되어,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무엇이 되어 버렸습니다.
A. intermission part I, II 지난 해 옛 기무사 터에서 열렸던 현대미술 페스티벌 ‘플랫폼 2009 기무사’에 참여하게 되어, 조각가이자 사진작가, 가구 디자이너인 장민승씨와 함께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작품 설명을 간단히 하자면, 기무사 수송대 건물을 통째로 하나의 공명통으로 사용한 오디오 및 조명의 설치작품이었습니다. 한여름 땀을 한 바가지씩 쏟으며 기무사 곳곳을 답사하고 실험을 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무사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맥락을 극적 요소로 활용하려는 것보다는 복도와 방 그리고 그곳을 이루고 있는 물질적 요소와 배열들이 만들어 내는 애트모스피어, 앰비언스 등을 음악창작과 비정형적인 재생(playback) 형식과 결합시켜 공감각적인 낯선 체험을 유도하려 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A. intermission’이었고 총 6파트로 이루어진 20분 정도의 음향 중, 두 부분을 발췌하여 앨범에 수록하게 되었습니다. 작품에서는 총 24대의 스피커를 건물 곳곳에 설치하여 재생하였던 음악을 스테레오로 들을 수 있게 조금 변형하였습니다. 앨범의 커버에서 보이는 노란 창문이 밤에 그 건물을 밖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막 미국 생활을 끝내고 오신 윤상씨께 믹싱을 부탁하였고(자기 믹싱 너무 잘한다고 너무 자랑하시길래...) 그의 집에서 이것저것 들어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sister 2009년 2월 유럽을 여행하였습니다. 그 중, 벨기에의 아쎌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로사쓰의 안무가 안 테레싸 드 키어쓰마커의 독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조안 바에즈의 공연 실황 음반이 엘피로 재생되면 그녀의 무용이 시작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무표정이지만, 톡 건드리면 바로 깨질 것 같은 그녀의 표정과 몸짓이 이 곡의 느낌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그냥 ‘sister’라고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너에게 가는 길 2008년, 극단 ‘학전’에서 김민기 연출의 ‘그림자 소동’이라는 어린이를 위한 연극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바쁘고 정신 없이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그림자들이 ‘이렇게 힘들게는 더는 못살아!’ 하며 집을 나가버리고, 가족들이 그림자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의 연극입니다. 이 연극에 사용됐던 음악에 박창학씨의 가사를 붙여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새로운 곡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엔 이름 모를 꽃들이 마치 나를 마중 나온 것처럼 많이 피어있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아무리 걸어도 힘들지 않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끝, 조금씩 확실히 지난 3월, 명동예술극장 제작, 이병훈 연출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이라는 연극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수십 곡의 음악이 삽입되고 러닝타임이 3시간에 육박하는 거대한 작품이었습니다. 2차 대전 중, 세르비아의 어느 시골마을에 유랑극단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이야기입니다. ‘전쟁과 배고픔 속에서 예술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세르비아 연극입니다. 공연 하루 전, ‘런 쓰루’라 불리는, 실제공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연습하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피날레에 가서 제가 만들었던 음악이 너무 경쾌하고 가볍다며 연출가께서 다른 곡을 써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공연 하루 전 날!!!!! 새벽에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가 작곡을 위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깨작깨작, 비실비실하다가 갑자기 일필휘지로 써 졌던 곡입니다. 궁지에 몰려 초인적 힘을 발휘한 듯 했습니다. 원래는 아코디언, 트롬본 등으로 발칸반도의 색깔을 담은 곡이었지만, 오케스트라와 전자악기들로 새롭게, 조금 웅장하게 편곡하여 수록하게 되었습니다.
주섬주섬 이 곡의 녹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취한 상태에서 데모를 만들어 지인들께 조금 들려 드렸는데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데모는 그야말로 데모이기 때문에 음도 연주도 부정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오케스트라도 삽입하고, 피아노 및 노래도 아주 좋은 녹음실에서 좋은 마이크로 녹음하였습니다. 완성된 그 버전을 들려 드렸더니 데모처럼 가슴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며 노래도 다시 녹음해 보고, 여러 시도를 하다가 ‘데모와 잘 다듬어진 것의 중간 정도로 가 보자’ 하여 선택된 버전입니다. 이 부분은 어느 뮤지션이나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혹은 급하게 했던 연주나 작곡이 심혈을 기울여 섬세하게 마친 그것보다 가슴을 움직일 때가 많은 것. 하지만 그 즉흥적이었던 것은 날아가 버려 다시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생 안고 가야 할 모순이랄까 딜레마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