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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부터 이승환을 앓았다, 이상하게. 그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 기다렸던 공연.

가을에 GMF에서 보긴 했지만, 그래도 추운 겨울, 그의 지난 날들의 음악이 듣고 싶었다. 그럼 좀 따듯해질까.

춥고, 눈 내리고, 길이 얼어 걷기 힘들었던 날. 오랜 소원처럼 그의 음악들을 만났다. 



#1. 이제 나보다 우리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대뜸 하수상한 시절에 안녕들 하시냐는 인사로 운을 뗐다. 

공연 때문에 정신 없을 줄 알았는데, '특별 회고전'이라는 공연 타이틀에 걸맞는 아련한 인사를 나눌 줄 알았는데, 그가 뱉는 인사가 서늘하다. 공연은 1집부터 10집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앨범 하나하나, 그 시절 이야기와 노래들을 들려주는 형식이었다. 1,2집 때 이야기를 하면서 유난히 '조력자들'이란 말을 많이 썼다. 문득 이 공연이 본인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는 의미보다 그렇게 함께한 '조력자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공연이었을까? 하는 생각.

영상속의 더 클래식(김광진), 정지찬, 유희열, 이규호, 그리고...... 오랜만의 오태호. 

붕장어에 소주 한잔을 마시며 단돈 만원에 샀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박신혜양이 그런 말을 했더라. 이승환이 꿈을 향해 달려가되,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줬던 사람이었다고. 그게 감사했다고. 그 주변에 함께하는 수 많은 '조력자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건 이승환 본인 삶의 모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면서도 절대 주변을 잊지 않고 고마워 할 줄 아는 사람.



#2.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노래를 잘 하거든요


이런 저런 방송 섭외가 들어오는데 다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엔 히든 싱어도 거절했다고. 아쉬워 할 팬들 맘을 알았는지, 어느 티비 프로에서 이승환 모창을 했다는 청년을 섭외해 공연에서 직접 '히든 싱어' 무대를 만들었다. 모창하는 청년이 이승환의 어떤 창법의 특징을 정확히 짚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목소리의 깊이와 가창력은 사실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청년을 들여보내고 이승환이 말했다. "난 그때(예전)보다 훨씬 더 노래를 잘 하거든요." 이건 자랑질도 아니고, 자기 과시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사실이었다.


매 순간을 죽을 각오로 무대에 오르고, 실로 가끔 무대에서 1분도 넘는 순간 동안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경험도 했다고. 우스개처럼 이자까야에 가면 요즘 메뉴판이 잘 안보인다는 말도 했지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 음악 한 가지를 위해 포기 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겠지. 그래서 건강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일테고. (그래도 내 또래 중에 내가 제일 건강할걸? 이라던 그의 멘트) 음악 때문에 연애를 하는 것 조차 두렵다는 사람. 장난처럼 말했던 '욕정'이란 말은, 그의 음악에 대한 욕망처럼 느껴졌다.



#3. 이 지긋지긋한 얼빠들 


"돈이 있어야 내가  하고 싶은 음악들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20대의 청년이 음악으로 번 돈은 오로지 음악에만 쓰겠다고 팬들과 약속했다. 약속. 팬들. 아주 많은 날들을 함께한 팬들. 이제는 소리 지르는게 무섭다며 놀려댄 '독신녀'들. 토요일 공연을 보러 오는, 불금이 뭔지도 모르는, 월요일이 힘들어 일요일 공연은 못 다니는, 그런 늙은 팬들. 그래도 센스 넘치는 팬들. 공연은 2/3 지점 뒤에서 봐야 제 맛인데, 아직까지도 앞자리를 사수 하는 '이 지긋지긋한 얼빠들'. 놀려대는 그와, 그래도 좋아하는 팬들의 관계를, 나도 좀 알 것 같다. 세월이 만들어낸 것들.


공연장 앞 팬들의 화환


#4. 난 서서히 내리막을 준비해 왔나봐요



하고 싶은 음악과 세상이 바라는 음악의 괴리. 조작이든, 조작이 아니었든 '사실'은 중요치 않았던, 은퇴하고 싶게 만들었던 사건들. 그럼에도 결국 한 길을 걷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이뤄낸 자. 97년까지 자신의 인기는 정점을 찍고, 이젠 자신의 내리막을 담담히 보고 있다는 사람. 

그건 내리막이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노을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별도 뜨겠지. 그 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빛들이 보일텐데. 그의 음악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날텐데.




공연이 끝날 무렵, 조명으로 생긴 그의 그림자가 관객석 왼쪽 벽에 너울거리는걸 한참 보고있었다.

그의 몸짓이, 그림자를 통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난 그의 그림자를 볼 일이 없겠구나, 싶어서. 그렇게 한참을 바라봤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의 어느날, 라디오 DJ가 그에게 "20세기에 버리고 싶은 것들"을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렇게 말하면 재수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는 저의 초창기 앨범들을 버리고 싶어요."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지만, 그 시절의 촌스러운 모습들과 영상들, 음악들을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며 즐길 수 있을 여유가 생긴걸까? 그렇길 바라본다. 많은 시절 그의 음악을 들으며 울고 웃었던 수 많은 팬들 중 한 사람으로써.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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