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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저자
박범신 지음
출판사
푸른숲 | 2008-03-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가장 차갑고 가장 뜨거웠던 7일이 시작된다! 히말라야 산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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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고 그리운 최종적인 지점은 아직 촐라체 북벽의 희고 어둑신한 그늘 속에 있다. 그것은 너무도 깊은 우물 갚아서 나는 감히 그리운 그것에게 지금 이름을 붙여 부를 수가 없다. 유한한 삶을 갈팡질팡 흐르면서, 누군들 비의(秘意)적인 불멸에 대해, 별에 대해 왜 꿈꾸지 않겠는가. 그것의 이름을 내가 지금 구체적으로 지어 부를 수 없을지라도, 그러나 나는 그것을 영혼 깊이 품고 있다는 것은 말해두고 싶다. 영성(靈性)은 그 무엇으로도 근원적으로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제 믿는다. 



해발 5600미터가 넘는 순례 코스 중 제일 높은 고개 돌마라(Dolma-la, 5630m)를 넘을 땐 눈물이 쏟아져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짐작건대 생을 견디면서 쌓인 내부의 독성들이 눈물을 타고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닐까. 아니, 무엇인지 모를 그리움이 뼛속 깊이 사무쳐 나오는 눈물이었다. 눈바람이 하루 종일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눈바람을 헤치고 세상의 끝까지 걸었다. 




'영우, 선우, 마야, 정순희'라는, 그가 죽어가며 차례로 새긴 이름들도 희망의 증거였다. 사랑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죽음으로 걸어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처럼 뜨겁고 단단한 사랑을 품은 사람이 어떻게 절망을 쫓아 산에 오를 수 있겠는가.


경험하진 못했지만 

만약 나도 거대한 자연과 부딪혀 홀로 그 속을 걸어 들어가는 날이 온다면,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눈물이 흐른다면 "아, 이것은 내가 생을 견디면서 쌓은 내부의 독성들이 눈물을 타고 흘러나오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려고. 그런 날이 온다면. 꼭 그렇게 생각하려고. 저 문구를 적어두었다. 어떤 그리움인진 알 수 없겠지만 그건 틀림없이 그리움의 결정체가 만들어낼 눈물이라고도, 생각한다.


"사랑이 남아있는 한 사람은 죽음으로 걸어가지 않는다."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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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박범신 (자음과모음,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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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사회 문제를 반영한 책이 되어버렸다"던 박범신님의 말씀 때문인가,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비슷한 문제를 다뤘지만 조정래님의 <허수아비 춤>이 굉장히 남성적 느낌이라면 이 책은 참 여성스럽다. 이팝나무가 그려내는 이미지와 그 안의 사랑 이야기는 더욱 그런 느낌을 배가 시킨다.

<은교>를 읽을 때처럼 단숨이 쉬지않고 몰입해서 읽었다.
마음 한켠이 무너지고, 입 안이 씁쓸해지지만
이게 픽션이 아니라 결코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할것 없는,
내가 살고 있는 내 나라의 현실이란걸 깨닫는 순간에는 숨이 턱 막힌다.

박범신은 끝내 여지를 남겨두었다.
사회가 변해주지는 못해도, 어떤 사람은 그 모든 '비지니스'를 멈추고, 진짜 사랑을 택할 수 있다는 여지를.
그렇게 남겨준 그 여지가 쓰레기더미 속에 피어난 꽃 한송이 처럼 느껴지는 책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일찍이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 라고 말했다. 그 잠언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진예술의 조류를 설명하던 노교수가, 현대에 들어와서 사진 예술은 완전히 자본의 감옥에 들어가고 남은 것은 사진을 빙자한 산업뿐이라고 설파하면서 인용했던 잠언이었다. 자본의 감옥에 들어간 것이 어디 사진예술뿐이겠는가. 정치가 들어가고 문화가 들어가고 사람들의 꿈과 이상도 다 그곳에 들어갔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도 일찍부터 그 감옥에 들어갔으며, 나 또한 이제 그 감옥에 수감되었다. p.70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향(花柳巷)으로 나가는 어미들이 있는 유례없는 나라가 내 조국이고, 그 어미의 가죽 채찍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세습되는 '귀족'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오직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나가는 전사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나라가 내 조국이었다. 어머니는 조국이다, 라는 잠언이 떠올랐다. 꿈이 조국이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잠의 어두운 터널에서 조차 이를 갈며 전사의 길을 가고 있는 정우의 얼굴엔, 그러나 차라리 '조국'이 없었다.  p.137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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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와 <은교>, 이번에 나온 <비지니스>까지.
난 이제서야 조금씩, 이 작가분을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유명하고, 많은 작품들을 쓰셨는데. 말이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박범신 작가님을 만나게되었다. 

그분의 말투. 목소리.
왜 어디선가 만난적이 있는 기분일까.
TV 같은 매체를 통해 이미 난 그분을 만난적이 있는걸까. 아님 그분의 책에서 오는 익숙한 기분 때문일까.

늘 사랑 이야기가 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박범신님.
하지만.
사랑은 뜨거운 열망으로 시작되지만 그 끝은 멸망이라며.
그렇지만 인생을 통해 그 멸망의 끝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행운이겠냐며.
여전히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분.

혈맹으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 보다
해체하여 진실함을 찾아가는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세상의 통념으로는 그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와 기득권을 향해 달려가며 서로가 서로를 좀먹고 파먹는 그런 가족관계가 과연 가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와
소설의 배경을 쓰게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아. 왠지 '글쓰기'도 science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과관계를 정의하고,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며, 거기에 본인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과학과 같은 맥락이라고 느껴졌다.

글을 쓰고 싶으면 문학의 제단에 손가락 하나라도 올려야 하지 않겠냐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으면 무엇 하나라도 희생하라고.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원하는 것 모두를 이룰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데,

언젠가 했던 "내 선택에 대한 기회비용을 기꺼이 감수하겠다" 라고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물론 저 기회비용 이야기는 김어준씨로 부터 온 이야기였지만.
어쩌면 단순한 명제일텐데. 참 어려운 이야기다.


이 흰머리 성성한, 예순을 넘긴 노작가는
끊임없이 달려나가며 아직도 글을 열정적으로 쏟아낸다.
그가 끊임없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을 앞으로도 더 만나고 싶다.

"나는 깊어지기 위해 넓어진다"
스피노자가 했던 말이라고 하시며 말씀하신 이 문장이,
유난히 마음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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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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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사람들이 아무도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평생 그 시대로부터 따돌림 당했으니 그는 고산자孤山子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 나라가 독점한 지도를 백성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그 뜻이 드높았으니 그는 고산자高山子요, 사람으로서 그의 염원이 최종적으로 고요하고 자애로운 옛산을 닮고, 그 옛산에 기대어 살고 싶어했으니, 그는 고산자古山子라고도 했다.

그의 이름이 김정호金正浩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우리나라의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박범신의 상상력이 발휘된 책.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보고,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그것처럼.
박범신도 그랬을까. 생존 시기와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이었던 김정호를 그는 이만큼이나 사랑했던 것일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개인적으로는 <은교>에 비해 몰입도는 떨어졌지만.

길은 조금도 무섭지 않다.
오랜 세월 풍상을 마다하지 않고 길에서 길로 떠돌았던 경험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생의 첫머리부터 그랬다고 그는 생각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오히려 길로 나와 흐를 때가 마음이 제일 편안했다. 두렵고 불안한 모든 것들은 머물러 있을 때 만나는 것들이었지, 흐르는 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아니었다.
흐르는 길에서 보는 모든 것은 그가 흐르듯 함께 흘렀고, 함께 흐르는 느낌으로 보는 모든 것은 서로 경계가 없이 한통속이 되고 말았다.
흐르면서 보는 삼라만상은 기실 얼마나 꽉 찬 세계인가.

-p.151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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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박범신 <은교>

Book- 2010. 11. 25. 00:52
은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박범신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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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
젊음의 끓어오름과 서투름.
나이듦의 완숙함과 서글픔.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는지.
인간의 가장 가운데에, 그러면서도 가장 낮은곳에 품고 있는 것은 욕망인 것인가.
그 밑바닥을 전부 다 뒤집어 보이며 일일이 적나라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문장력은 그 욕망과 사랑을, 실제 내 눈으로 보고있게끔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프롤로그 가장 마지막에 있던 그 문장처럼, 이 책은.

관능적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 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p.12


그렇다. 그 해 가을, 내 집에 하나의 움직이는 '등롱'이 들어왔다. 사실이다. 내 자의식에 인화된 사진 속 나의 집은 그애를 만나기 전까지 오로지 우중충한 무채색의 어둠에 싸여 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허물어져가는 '어셔 가' 저택처럼. 그애가 들어오고, 비로소 내 집에 초롱이 켜졌다. 가을이 깊을 때까진 말 그대로 그애는 다만 꽃초롱, 혹은 등롱이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은 비교적 양지바른 곳에 은거해 있었고, 특별히 포악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서 그애가 아래위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쓸고 닦는 것을, 보지 않으면서 언제나 다 보고 있었다. 그애가 움직이는 대로, 마치 어두운 동굴 속, 초롱불 하나가 오르락 내리락, 내 발 앞을 밝히는 것 같았고, 그 초롱을 따라 걸으면 발바닥까지 다 따뜻했다. 나는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말을 빌려, 자주 혼자 중얼거렸다.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 p. 59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p.251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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