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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뉴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중혁 (문학과지성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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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과 그대로 이어지는 듯 한,
정말 모르고 접해도 김중혁인지 알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넘치는 책.

라디오나 지도, 타자기, 자전거와 같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아. 이 사람은 무슨 백과사전인건가." 싶을만큼
정확하고 심도있게,짧고도 밀도 있게 묘사하여
상상력 넘치면서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김중혁만의 독특한 단편이 완성된다. 

<악기들의 도서관>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  내용 곳곳 음악을 숨겨놓는다.
<무용지물 박물관>에서는 비틀즈의 음악이,
<펭귄뉴스>에서는 RATM의 음악이.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이 좋다.
<좀비들>을 이제 읽으려고 하는데, 부디 단편만큼 장편도 재미있길 바라며.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볼까 한다.


사진은 사람뿐 아니라 시간을 붙들기도 한다. 아니, 시간을 붙들 수는 없다. 시간을 붙들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가고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멈춘다. 사진은 그렇게 시간과의 달리기에서 계속 뒤쳐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70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어머니는 무덤도 싫고 납골묘도 싫다셨다. 그냥 어디에라도 뿌려 달라고 하셨다. 뭐라도 이 세상에 흔적이 남는게 싫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버려지는게 싫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자리를 틀어잡고 앉아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는게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존재가 없으면 버림받을 일도 없다. 어머니는 이제 강물과 레이스를 펼치고 계실 것이다. p.76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어머니의 실체가 갑자기 생생해졌다. 어머니의 살가죽을 닮은 표면을 만지고서야 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 한심했다. 어째서 기억이란 것은 매개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온전하게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는 것일까. p.78

오차와 오류는 어디에나 있다. 지도에도 있고, 자동차에도 있고, 사전에도 있고, 전화기에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다. 없다면 그건, 뭐랄까,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다. p.80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어떤 때는 공간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많은게 바뀌는 법이란다. 네가 할 일은 거기에서 여기로 이동하는 것 뿐이야.

난 여기에서 에스키모를 연구한 다음 많은 걸 깨달았다. 에스키모들에게는 '훌륭한'이란 단어가 필요없어.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어.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보이고 보이지 않고는 중요한게 아니야. 모든 연필들은 만들어질 때부터 운명이 결정돼 있어. 나무결에 이미 연필의 운명이 숨어 있단 말이야. 물론 그 결을 제대로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야. 
<바나나 주식회사>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비트 역시 포기해야 하는 것들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치욕적인 일이죠. 저는 앞으로 점점 더 슬퍼질 것이며 심장의 움직임 역시 밋밋한 중얼거림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비트가 펭귄뉴스 박물관의 귀퉁이를 조금씩 흔들어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녀의 기억이 비트로 바뀌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쿵쾅거릴 수 있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입니다.
만약 펭귄뉴스가 없어진다 해도 나의 아름다웠던, 한때의 비트는 영원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가슴이 따끈하게 데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펭귄뉴스>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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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신경숙 <리진>

Book- 2011. 1. 30. 19:41

리진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신경숙 (문학동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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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고산자>를 읽고 신경숙의 <리진>을 이어 읽었다.
의도 했던 것은 아니였는데 묘하게 시대적으로 이어진 기분이었다.
박범신이나, 신경숙이나 - 사실 김정호, 리진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에 대해 좀 많이 묘사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나는 그 시대를, 그 슬픈 시대를 읽어나갔다.

이 책을 읽고 난 이후, 몇번 인터넷 기사에서
리진이라는 인물이 실제 존재 했다/존재하지 않았다 하는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같은 인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
리진을 쓴 신경숙이나, 리심을 쓴 김탁환이.
그 인물의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만들어낸 이 여인은,
그들의 작품 안에서는 분명 실제 살아 호흡하는. 그들이 만들어 숨을 불어넣은 인물이니까.
김탁환의 리심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신경숙의 리진은 분명 역사 소설은 아니다.


재미있게 몰입해서 읽다가 끝으로 가서는 펑펑 울어버렸다.
몸이 너무 아팠을 때 읽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고 약한 나라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살아야 하는 그녀에게 자유라는 것은 그저 고통뿐이었을테니.


나를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들을 깨뜨리고 나를 느끼는 일은 설레지만 두렵고 심장이 뜨거워질 만큼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리진의 편지 中

모든걸 다 잃어버려, 결국 스스로의 목숨까지 끊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녀.



아. 어쩌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디에다 견주려하나 그래볼수록 이 세상이 좁아 마땅히 견줄 수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강연의 편지 때문에. 내 마음이 그렇게 아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여인이 궁에서 나와 법국의 공사관에 머물기 시작한 순간부터 여태 강연은 아무데서나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과 싸우며 살았다. 이 여인이 머나먼 법국으로 떠난 후 강연은 짐승이든 사람이든 눈에 띄는 상처 입은 것들에게 대금을 불어주었다. 버려진 것들을 거두고 보살폈다. 사람으로 났으니 사람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는 서씨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었다. 죽을 것 같은 것을 살려내면 그 기운이 머나먼 곳의 이 여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 여기는 기도 같은 것이었다.  <리진2> p.254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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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와 <은교>, 이번에 나온 <비지니스>까지.
난 이제서야 조금씩, 이 작가분을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유명하고, 많은 작품들을 쓰셨는데. 말이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박범신 작가님을 만나게되었다. 

그분의 말투. 목소리.
왜 어디선가 만난적이 있는 기분일까.
TV 같은 매체를 통해 이미 난 그분을 만난적이 있는걸까. 아님 그분의 책에서 오는 익숙한 기분 때문일까.

늘 사랑 이야기가 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박범신님.
하지만.
사랑은 뜨거운 열망으로 시작되지만 그 끝은 멸망이라며.
그렇지만 인생을 통해 그 멸망의 끝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행운이겠냐며.
여전히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분.

혈맹으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 보다
해체하여 진실함을 찾아가는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세상의 통념으로는 그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와 기득권을 향해 달려가며 서로가 서로를 좀먹고 파먹는 그런 가족관계가 과연 가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와
소설의 배경을 쓰게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아. 왠지 '글쓰기'도 science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과관계를 정의하고,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며, 거기에 본인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과학과 같은 맥락이라고 느껴졌다.

글을 쓰고 싶으면 문학의 제단에 손가락 하나라도 올려야 하지 않겠냐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으면 무엇 하나라도 희생하라고.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원하는 것 모두를 이룰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데,

언젠가 했던 "내 선택에 대한 기회비용을 기꺼이 감수하겠다" 라고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물론 저 기회비용 이야기는 김어준씨로 부터 온 이야기였지만.
어쩌면 단순한 명제일텐데. 참 어려운 이야기다.


이 흰머리 성성한, 예순을 넘긴 노작가는
끊임없이 달려나가며 아직도 글을 열정적으로 쏟아낸다.
그가 끊임없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을 앞으로도 더 만나고 싶다.

"나는 깊어지기 위해 넓어진다"
스피노자가 했던 말이라고 하시며 말씀하신 이 문장이,
유난히 마음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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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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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박민규 (문학동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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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이 얇은 책 한권에, 지구 전체의 부조리와  거대한 상상력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힘은 곧 정의와 같다고, 그래서 세상의 '나쁜 일'을 모두 무찔러 없애버려야 하겠다는 슈퍼맨의 이야기가
비단 세계속에서 '정의'라는 명분으로 미국이 저지르고 있는 일들에 대한 풍자만은 아닐것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진짜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힘'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는.
그런 세상속에서.

그래서 박민규 특유의 유머에도
웃을 수가 없다.

"아니, 이 세상엔 상당수의 리들러들이 있어. 그들은 모두 '의혹'을 품고 있는 인간들이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즉 이 세계의 '정의'에 대해서 말이야. 웨인은 리들러들을 용납하지 않아. 만약 누군가가 리들러임이 탄로났다면 그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

"그럼 로빈은......"

"그래, 나는 사실 리들러야. 그래서 이렇게 너에게 충고하는 거야. 넌 절대 '의혹'을 가지지 마. 이 세계의 의혹은 네가 감당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p.88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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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잃어버린것을기억하라시칠리아에서온편지
카테고리 여행/기행 > 해외여행 > 유럽여행
지은이 김영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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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나에게 주어졌던 일주일의 휴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기 전에 어디든 떠났다가 오고 싶었고.
비록 3박 4일 짧은 일정이지만 막무가내- 무리를 해서 여행 일정을 세웠다.

여행 안내 책자를 펴보고, 어디를 여행할건지,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 와 같은 여행 계획을 짜기전에
가장 먼저 한일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지난 시간 이곳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이 여행에서 기억해 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내어. 내가 다시 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행 일정은 짧고 빡빡했으니까.




나는 유명인들이 '모든걸 다 버리고' 여행을 간다고 하는 식의 여행기를 믿지 않는다.
그들이 모든걸 다 버리지 않았다고 믿기에.
손미나 전 아나운서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여전히 저명한 인사들이고, 그들은 여전히 책을 쓸 수 있고, 여행기를 세상에 내 보일 수 있다.


내가 모든걸 다 버리고 여행을 다녀온 뒤엔 그래서 나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뒤에는,
난 무엇을 하게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모든걸 다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욕망과, 모든걸 다 버리고 난 뒤 아무것도 새로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동전의 양면같은 내 감정 때문에 나는 이런 책들의 그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것일까.


지난 해, 교토를 여행하던 때에  들렀던 어느 유서깊은 사찰을 보고도 내가 감흥을 받지 못했던건, 그래서 '참 사진 찍기 좋은 장소'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했던건 내가 그들의 역사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김영하가 보고, 느끼고, 그려내는 시칠리아 이야기는 시칠리아의 오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신(神)들의 이야기까지도 포함하고 있어, 머릿속으로 지도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낯선 시칠리아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알게 된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의 그 말이. 정말 말 그대로 였던 것이다.


결국엔 여행을 다녀와서도 열흘이나 있다가 이 책을 다 읽게 되었다.
오늘 아침 트위터에서 이병률씨가 서른이 되기전에 우리는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고, 마흔이 되기전에 우리는 미친듯이 살아야 한다고 적어놓은 그 글이 마음에 들어 리트윗을 해 놓았다.
미친듯이 살아가는 서른 몇의 중턱쯤에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쓰러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도 이 책에서 김영하가 그랬듯, 모든걸 다 버리고 시간이 멈춰있는 유럽의 어느 도시를 떠돌아보고 싶다.
그때쯤에는 그를 더 이해할 수 있겠지.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줄 수 없는, 내 몸의 일부로 그런 풍경을 새길 수 있는 날이 나에게도 올 수 있기를.

노토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묻는다. 왜 노토 사람들은 그토록 먹는 문제에 진지해진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들이 300년 전의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p.240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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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사람들이 아무도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평생 그 시대로부터 따돌림 당했으니 그는 고산자孤山子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 나라가 독점한 지도를 백성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그 뜻이 드높았으니 그는 고산자高山子요, 사람으로서 그의 염원이 최종적으로 고요하고 자애로운 옛산을 닮고, 그 옛산에 기대어 살고 싶어했으니, 그는 고산자古山子라고도 했다.

그의 이름이 김정호金正浩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우리나라의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박범신의 상상력이 발휘된 책.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보고,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그것처럼.
박범신도 그랬을까. 생존 시기와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이었던 김정호를 그는 이만큼이나 사랑했던 것일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개인적으로는 <은교>에 비해 몰입도는 떨어졌지만.

길은 조금도 무섭지 않다.
오랜 세월 풍상을 마다하지 않고 길에서 길로 떠돌았던 경험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생의 첫머리부터 그랬다고 그는 생각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오히려 길로 나와 흐를 때가 마음이 제일 편안했다. 두렵고 불안한 모든 것들은 머물러 있을 때 만나는 것들이었지, 흐르는 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아니었다.
흐르는 길에서 보는 모든 것은 그가 흐르듯 함께 흘렀고, 함께 흐르는 느낌으로 보는 모든 것은 서로 경계가 없이 한통속이 되고 말았다.
흐르면서 보는 삼라만상은 기실 얼마나 꽉 찬 세계인가.

-p.151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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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도서관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중혁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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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나누지 않더라도, 어떤 이름 하나만으로 서로 달랐던 공간과 시간이 하나로 합쳐지는 경험. 지난달에 있던 이적의 공연을 함께 보고, 우리는 맥주를 한잔씩 마셨고, 그렇게 앉아 우리는 '패닉'과 '이적'을 좋아했던 서로 다른 경험을 꺼내놓았다.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를 모르는 채 오랜시간 살아왔지만, '이적'이라는 음악인의 이름만으로 접점이 만들어지는, 그래서 마치 함께 있었던 것 처럼 느껴졌던 시간.

얼마전 '유희열'이라는 사람을 주제로 우리는 같고도 다른, 다르고도 같은 이야기를 썼고, 나는 '악기들의 도서관' 중의 <나와 B>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음악 이야기를 했다.
A부터 Z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이름을 쉴새없이 내뱉었다. 때로는 완벽한 문장을 말하는 것보다 어떤 이름이나 어떤 단어가 어떤 고유명사를 얘기할 때 이야기가 더 잘 통하는 법이다. 그때가 그랬다. 그저 누군가의 이름을 대기만 했는데도 10년을 알아온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치 핵 융합같은 것이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시간 만에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악기들의 도서관> p.191 -나와 B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읽었다.
김중혁의 표현들은 청각과 시각과 때로는 후각과, 통각까지 그 모든것을 아우르고 있어서 좋다.
때로는 그의 문장에서 향기가 나는것도 같고, 때로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때로는 손에 잡힐듯 하기도 하다.


이적의 공연을 본 날,
친구들과 '가사'에 대하여 이야기 했고,
정말 좋은 가사는 마음에 울림을 남기지만, 
때론 '가사'가 음악을 듣는데에 때로는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나눈 그날 밤의 이야기가  <나와 B>이야기의 어느 한 부분과 또 닿아있어,

나는 이 책이 더욱 좋아졌다.
"어쿠스틱 기타는 사람의 목소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요. 
사람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 소리를 최대한 줄여놓은 거죠. 
밥 딜런 선생님께서 전기 기타를 들고 나타난 건 자신의 목소리와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목소리가 하나의 악기가 되려면 전체 음악에 묻혀야 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래서 전기기타가 필요했던 거에요. 실제로 관객들이 야유를 퍼부었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예요. 작전이 제대로 들어맞은 거죠. 
의미보다는 음악이 중요해요. 밥 딜런 선생님께서는 무의미의 음악을 창조하셨어요. 음악에서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사 같은건 들리든 말든 상관없어요."

p.193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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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박범신 <은교>

Book- 2010. 11. 25. 00:52
은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박범신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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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
젊음의 끓어오름과 서투름.
나이듦의 완숙함과 서글픔.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는지.
인간의 가장 가운데에, 그러면서도 가장 낮은곳에 품고 있는 것은 욕망인 것인가.
그 밑바닥을 전부 다 뒤집어 보이며 일일이 적나라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문장력은 그 욕망과 사랑을, 실제 내 눈으로 보고있게끔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프롤로그 가장 마지막에 있던 그 문장처럼, 이 책은.

관능적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 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p.12


그렇다. 그 해 가을, 내 집에 하나의 움직이는 '등롱'이 들어왔다. 사실이다. 내 자의식에 인화된 사진 속 나의 집은 그애를 만나기 전까지 오로지 우중충한 무채색의 어둠에 싸여 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허물어져가는 '어셔 가' 저택처럼. 그애가 들어오고, 비로소 내 집에 초롱이 켜졌다. 가을이 깊을 때까진 말 그대로 그애는 다만 꽃초롱, 혹은 등롱이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은 비교적 양지바른 곳에 은거해 있었고, 특별히 포악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서 그애가 아래위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쓸고 닦는 것을, 보지 않으면서 언제나 다 보고 있었다. 그애가 움직이는 대로, 마치 어두운 동굴 속, 초롱불 하나가 오르락 내리락, 내 발 앞을 밝히는 것 같았고, 그 초롱을 따라 걸으면 발바닥까지 다 따뜻했다. 나는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말을 빌려, 자주 혼자 중얼거렸다.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 p. 59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p.251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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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슈퍼스타즈의마지막팬클럽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박민규 (한겨레신문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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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은지가 좀 오래된 듯 싶었다.
소설책이 줄 수 있는 그 느낌이 문득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될 수 있으면 너무 무겁지 않게. '
'우리말이 줄 수 있는 느낌을 살린 한국 소설'
이번에 도서관을 가면서 빌리고 싶다는 책의 종류는 이러 했고, 마침 박묭이 추천해준 박민규를 시작해볼까 싶었다.

몇번 읽어볼까 했었지만 너무 가벼운 듯 하여 괜히 망설였던 그 책.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그의 소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쾌했고,
내가 좋아하는 '야구' 소설이었고,
그의 문체는 감각적이었다.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종일관 가벼워보이는 순간에도 진중함이 있었고,
시종일관 무거워 보이는 순간에도 위트를 잃지 않는다.
스포츠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냈던 <아내가 결혼했다>보다 더 와닿는 느낌이 드는건, 
내가 야구팬이기 때문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아- 어쩐지 이걸 읽고 있으니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야구 정신>에 가장 잘 맞는 그런 음악이 아니였을까. 프로들이 난무하는 이 음악 세계에서.

나는 다시 슈퍼스타즈를 생각했다. 그리고 삼미의 팬이었던 나의 유년과, 현재를 생각했다. OB와 삼성, 혹은 MBC나 해태의 팬이었던 또래의 소년들에 비해 나는 염세적인 소년이었고, 자신감이 없었으며,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고 있었다. OB의 팬이 아니라면, 삼성의 회원이 아니라면, 아니 프로야구가 없었다면- 그 소년들과 나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문제는 내가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던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16살의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다. 소속이 문제였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p.129-130



'소속'의 슬픔이란 그런 것이다. 이른바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 집단에서도 이 '소속'의 콤플렉스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사실 그래서, 인간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 
p.144-145

제대를 하면서, 나는 '소속'의 고민과 비슷한- 또 하나의 강박관념을 그곳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계급'이었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소속 안에서, 또 다시 여러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 었었던 것이다. 마치 지구가 위도와 경도로 나뉘어있듯- 결국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이 세계를 분할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위도 몇에 경도 몇...... 결국 그곳에 한 인간의 좌표가 위치해있고, 우리의 삶은 여간해서 그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p.203





아. 몇차례 LG 트윈스 팬인 친구들에게 밝힌바 있지만.
난 MBC 청룡 어린이 회원이었다. 
그치만 지금은 열렬한 베어스 팬이지.

박민규가 말한대로.
인생은 이상한 것이다.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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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위의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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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전경린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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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
어디선가 이 책의 이 구절을 봤고, 마음에 남았다.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도서관의 책들은 모두 대출중이었고, 교보문고에 들린 김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내가 책을 그리 빨리 읽는 편이 아닌데.
호흡이 길지 않은 문체. 뛰어난 가독성. 역시 전경린.

누경의 유리 공예품들처럼.
아름답고 투명하지만 깨어질 수도 있는
그녀의 문장들은 그런 느낌. 그래서 조금은 불편하기도 한 느낌.

난 이제 이런 감성이 차고 넘치는 글이 불편한 나이가 된걸까.
전경린의 글을 진짜 좋아했었는데. 

문장 하나하나에는 감탄하며 읽으면서도. 
어쩐지 그 사랑 얘기가 '진짜'가 아닌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나는 쓴다. 쓰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흩어질까봐.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쓴다. 이 소중한 것을. 이 찬란한 것을.

사랑에 관한 한,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에 엄청난 권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곤 한다. 


Posted by [TK]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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